[기획특집Ⅱ] 하와이 묘비에서 되살아나는 이만정 선생의 독립운동 기억 찾기
페이지 정보
본문
- 국립창원대학교 박물관, 하와이 한인 이민 1세대 묘비 현장 조사
- “잊힌 이름에 국가가 응답할 때”… 이만정 선생의 행적 확인 중
- 당시 기부 기록 및 신문 보도 다수 발견… “국가 차원의 체계적 조사 필요”
▲하와이 한인 이민자 묘지에 안장된 이만정 선생 묘비석(증손 이은환제공)
하와이 한인 1세대의 묘비에서, 잊힌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이 되살아나고 있다. 하와이 교민 1세대 ‘디아스포라’ 그 중심에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경북 성주 출신의 이만정 선생이다.
하와이 이민 생활을 노동자로 시작한 그는,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여러 민족단체에 기부하고 활동했던 흔적이 다양한 사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국가보훈처의 독립 유공자 명단에는 이름이 올라와 있지 않다.
국립창원대학교 하와이 한인 이민 1세대 조사단은 2019년부터 하와이를 수 차례 방문해 현지 묘지에 안장된 1,100여 명의 한인 이민자 묘비를 일일이 조사해 왔다.
그 결과, 독립 자금을 기탁 하거나 대한인국민회 등 항일단체에서 활동한 기록, 심지어 안중근 의사의 구명 의연금 명단에 이름이 포함된 인물들까지 확인되고 있다.
기록과 기억에서 잊혔던 이들의 이름이, 이제야 다시금 호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명예 회복을 넘어, 역사의 공백을 메우고 ‘기억하는 국가’의 역할을 다하는 일이다. 김 실장의 외로운 작업에 이제 국가와 사회가 응답할 차례다.
본보는 지난 3월 30일 특집기사, [3월기획특집] 잊힌 영웅, 독립운동가 이만정(만직) 선생을 기억하다...에 이어 연속 기획보도한다. – 편집자 말 –

●‘이만정’… 이름은 남았지만 증거는 부족, “공적 입증 위한 시간 필요”
조사 책임자인 국립창원대학교박물관 김주용 학예연구실장은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토대로, 1902~1905년 입항 선박 명부, 하와이 지역신문 ‘국민보’ 기사, 독립자금 기부 명단 등 다양한 사료를 정밀 분석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실적인 어려움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이만정 선생의 아들로 추정되는 ‘이명술’의 제적등본에는 부친이 1902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유족은 제적 등본은 오기, 당시 이만정 선생이 행불되자 일제가 강제로 사망신고를 했다고 주장)
‘이만정’이라는 이름 자체도 동명이인과의 혼동 가능성이 있어 동일인 여부에 대한 검증이 어렵다. 족보상 '이만직'(一名), '이계인'(字)이라는 다른 이름 사용 여부도 정확한 식별을 방해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등록 기준으로 단순 정황증거나 후손의 증언이 아닌, 직접적이고 객관적인 독립운동 활동의 기록을 요구하고 있다. 단체 가입이나 명단 기재만으로는 부족하며, 실제 참여를 입증할 수 있는 문서 또는 공문서 수준의 사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에는 한계… 국가 차원의 연구 필요”
김 실장과 국립창원대 조사단은 오는 2025년 6월 다시 하와이를 찾아 한인 1세대 묘비 추가 조사와 자료 수집에 나설 계획이다.
그는 “현재 후손 이은환 씨가 소장하고 있는 당시 서신 등의 자료를 분석 중이며, 이후 추가 검증도 계획하고 있다”며 “이만정 선생은 하와이에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납부한 것으로 확인돼, 그 업적을 면밀히 고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한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삶은 개인사를 넘어선 역사이며, 국민의 관심 속에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가능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미 상당수의 묘비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 훼손되고 있어, 늦기 전에 이들에 대한 기록화 작업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당시 미주지역에서 촬영된 도산안창호선생과 대한인국민회 회원사진 추정본(증손 이은환 제공)
●“디아스포라 연대의 숨은 주역, 이만정”
이만정 선생은 안창호·김구·이승만 등 중국이나 미국 본토에서 활동한 인사들과는 또 다른 결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하와이 한인 디아스포라 공동체 내부의 결속과 조직화에 헌신하며, 미주 한인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지속적으로 헌신했다.
그의 기금 모금 활동과 교육 사업, 독립운동 인식 확산 노력은 하와이 한인 사회 전체를 하나로 엮었고, 이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외교·군사 활동을 후방에서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었다.
비록 조명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조용한 헌신은 결국 한국 해방의 밑거름이 되었다.
▲1949년3월 2일字 하와이 국민보에 실린 이만정선생 부고기사-1949년 2월5일 80세 서거-(국립창원대학교 박물관제공)
●“유족의 바람은 단 하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것”
후손 이은환 씨는 “할아버지가 평생 나라를 걱정하며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며 “유공자 등록은 명예나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조사된 1,100기 묘비 가운데, 선박 명부와 일치하는 사례는 300기 이상이며, 이 중 약 150명은 독립자금 기탁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이만정 선생 역시 많은 독립자금을 납부한 인물로 주목받고 있다.
김 실장은 “이만정 선생이 보낸 편지 등 당시의 기록이 일부 남아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고증 작업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며, “그의 사례는 단지 한 인물의 복권을 넘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복원의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묘비에 남은 이름 하나가 잊힌 역사를 되살리고 있다. ‘이만정’—그 이름이 ‘독립유공자’라는 명예와 함께 대한민국의 공식 기록에 남게 될 그날까지, 이 조용한 탐색은 계속될 것이다.
함희동 기자 seouldaily@hanmail.net
#평택in뉴스 #평택시 #평택인뉴스 #평택 #하와이독립운동 #하와이디아스포라 #이만정 #국립창원대학교 #창원대학교박물관 #한국국민의회
- 다음글[3월 기획특집] 하와이 독립영웅, 독립운동가 이만정(만직) 선생을 찾아서... 25.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