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기획특집] 하와이 독립영웅, 독립운동가 이만정(만직) 선생을 찾아서...
페이지 정보
본문
- 경남 진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후 전국 돌며 항일운동을 전개 일경 체포
- “청도에서 상하이로, 그리고 하와이로” 디아스포라의 중심에서 빛난 항일 정신
-독립운동의 숨은 주역… 서훈 거부 75년… “조국은 왜 아직 그를 외면하는가”
▲ 독립운동가 이만정(예명 만직) 선생의 생전 모습. (사진 제공: 증손자 이은환)
3월, 우리는 다시금 ‘독립’의 의미를 되새긴다. 전국 곳곳에서 만세 함성이 울려 퍼진 지 106년이 흐른 지금, 누군가는 기억되고, 누군가는 잊힌 이름으로 남아 있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고(故) 이만정(1870~1949) 선생도 그러하다. 3·1운동의 현장에서, 하와이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중심에서,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방에서 조용히 헌신했으나, 그의 이름은 아직 독립유공자 명단에 없다.
이만정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특히 하와이의 한인 디아스포라 사회 내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헌은 결정적이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나, 현재까지 보훈처는 서훈을 위한 증빙서류를 요구하며 그를 독립유공자로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만정 선생의 독립운동 이력은 미국 하와이 한인사회와 독립운동 기록, 상해 임시정부 자료, 대한민국 독립기념관 보관 자료, 경상북도청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본지는 이만정 선생의 역사적 발자취를 추적하고, 그가 정당한 평가를 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 편집자 말-

(사진 제공: 증손자 이은환)
■ 출생과 독립운동의 시작 “조국이 기울자, 가산과 가정을 뒤로하다”
고(故) 이만정(만직) 선생은 1870년 7월 24일,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봉두리 897번지에서 훈련도감 후손 가문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인(季仁), 본관은 경산이며 천봉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뜻과 행실이 고결하여, 세속의 명리나 가사에 얽매이지 않고, 날로 기울어가는 국운을 통탄했다고 전해진다.
현재도 그의 생가는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원형을 유지하며 보존되고 있다. 한학 서당을 운영하며 훈장으로 후학을 양성하던 그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소식을 접하고 격분하여, 가족과 가정을 뒤로한 채 항일운동과 조국 독립에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특히 3·1운동과 임시정부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지역사회에서도 존경받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 이만정 선생의 족보 기록. (사진 제공: 증손자 이은환)
2005년 10월 3일 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는 1919년 3·1운동 당시 경상남도 진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중국 청도, 상하이,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정 지원을 위해 헌신했다.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독립자금을 마련하며 헌신적인 활동을 펼친 것이다.
그는 경남 거창, 진주, 함양, 의령, 사천을 돌며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나, 일본의 감시가 강화되면서 점차 활동이 어려워졌다. 1911년 극심한 절망 속에 자결을 시도했으나 동지들의 만류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진남포로 거처를 옮겨 독립운동을 지속했고, 서울에서 항일 선전물을 배포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 1961년 대구광복선열추모회가 발간한 『독립운동사 약전』에 실린 이만정 선생의 기록.
독립운동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자료다. (사진 제공: 증손자 이은환)
■일본 경찰 체포와 탈출, 망명 그리고 독립자금의 헌신자
대한동지회
경기도 안성에서 일본의 침투로 독립운동이 악화되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분신을 시도했으나 동지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음성, 진천, 괴산을 돌며 전단을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나, 동지들의 도움으로 중국 청도로 망명했다. 망명 전 그는 서울과 함경남도 박천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지하 활동을 이어갔다.
일본의 감시망이 강화되자 그는 동지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목포항과 진남포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동지들이 먼저 출발한 상태였고, 홀로 남겨진 그는 목포항 부두에서 조국 독립을 향한 결의를 다졌다. 청도에 도착한 그는 상하이로 이동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 서재필, 한동선 등과 접촉하며 조국 광복운동에 참여했다. 자금 조달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독립자금 마련에 헌신했다.
■미국 하와이 디아스포라의 숨은 영웅 “조용한 헌신, 그러나 역사에서 사라진 이름”
하와이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번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부하며 조국의 독립을 지원했다. 1909년부터 1920년까지 하와이 국민회가 모은 독립자금은 300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이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안창호, 김구, 이승만 등 본토에서 활약한 인물들과 달리, 이만정 선생은 하와이 한인 커뮤니티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의 인식을 확산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기금 모금과 교육, 실업 발전에 힘쓰며 공동체의 자립과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했다.
이만정 선생은 한국인 제1감리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대한부인회와 협력해 일본 제품 배척, 자녀 한글 교육, 독립운동 참여 독려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그의 헌신은 독립운동사에서 결코 작지 않은 무게를 지닌다.
▲ 하와이 한인 묘역에 위치한 이만정 선생의 묘비.
고국의 품에 안기지 못한 채, 그는 이국의 땅에서 영면했다. (사진 제공: 증손자 이은환)
■“독립운동의 대가”로 가족의 생계조차 빼앗긴 슬픈 현실
그는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1949년 2월 28일 하와이에서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생전에 가족을 돌보지 못한 결과, 부인 조남이 여사는 굶어 사망했고, 아들 이명술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다. 손자 이상우 역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비극을 겪었다.
고(故) 이만정 선생의 유족은 4대에 걸쳐 극심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독립운동의 대가로 가족들은 빈곤과 박해 속에서 살아야 했으며, 정부로부터 정당한 예우를 받지 못했다. 보훈처는 독립운동 기록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서훈 신청을 거부하고 있으며, 유족들은 75년 넘게 독립유공자 인정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 하와이 감리교단 김선복 목사가 보낸 이만정 선생 사망 확인 서신.
그는 1949년 하와이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사진 제공: 증손자 이은환)
■다시 쓰는 역사, 이제는 국가가 나설 때 “증빙 없으면 독립유공자 아니다?” 진정한 역사적 평가 절실
이만정 선생의 공헌은 하와이 한인 사회에 강력한 지원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는 광범위한 독립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그의 노력은 한국이 일본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되는 데 총체적으로 기여했다.
이만정 선생의 독립운동 기록은 하와이 한인사회, 하와이 감리교단, 임시정부 자료, 독립기념관, 경상북도청 등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보훈처는 여전히 증빙서류를 이유로 서훈을 거부하고 있으며, 반면 일부 가짜 독립운동가들이 변호사·언론의 조력을 받아 유공자로 인정받는 현실은 심각한 모순으로 지적되고 있다.
▲ 경상북도청과 독립기념관에 남은 이만정선생 기록
이만정 선생의 독립운동은 단순한 개인의 희생이 아닌, 디아스포라 한인사회의 결속을 이끌어낸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다.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독립의 역사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는 그의 헌신에 걸맞은 예우를 시행하고, 후손들이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나서야 한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며, 그 기억은 정의와 공정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본지는 이만정 선생의 독립운동 이력과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잊힌 독립운동가의 역사적 위상을 복원하고자 한다. 선생의 이름이 독립유공자로 정당하게 기록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지속적인 보도를 이어갈 것이다.
함희동 기자 seouldaily@hanmail.net
#평택in뉴스 #이만정 #평택인뉴스 #이만직 #하와이독립운동가이만정 #하와이디아스포라 #하와이한인묘지 #대한동지회 #하와이독립운동 #이승만
- 다음글[서인호 칼럼] 평택 장사시설 건립, 갈등의 골을 넘어 상생의 가교로 25.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