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조선판 조세정의 제도, ‘평택시 대동법시행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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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김희태(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조선판 조세 정의 제도, ‘평택시 대동법시행기념비’
평택시 소사동에 자리한 ‘대동법시행기념비’는 여러모로 많은 주목을 받는 비석이다. 이 비석은 조선 최고의 개혁으로 불리는 대동법을 시행하는데 있어 큰 공을 세웠던 영의정 잠곡 김육(1580~1658, 이하 김육)이 세상을 떠난 뒤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비석으로, 호서지방에서 대동법이 시행된 것을 기념하여 삼남의 통로였던 평택에 이 비를 세운 것이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신분제를 비롯해 사회상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과정이었는데,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이 비석을 세울 만큼 당시 대동법의 시행은 조선 사회의 큰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는 많이 재편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 되었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막부가 도쿠가와 막부로 세력이 교체되었지만 조선은 여전히 망하지 않고,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특이할 만 하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 대동법이라는 개혁을 통해 조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높이 평가를 내리기도 하는데, 이러한 대동법을 시행하는데 있어 그 자신의 명운을 걸었던 김육의 모습에서 백성들은 많은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대동법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중요하다. 실제로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대동법 문제는 과전법과 함께 단골로 출제가 되고 있다.
▲ 평택시 소사동의 ‘대동법시행기념비’, 호서지방에 대동법이 시행되는것을 기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이 비석이다
◇ 대동법은 무엇인가?
대동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시대의 조세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이야 우리는 국가에 세금을 납부할 때 화폐로 지불하지만, 당시만 해도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시대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에 조세는 크게 토지에 대한 세금과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일종의 공납이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국토가 황폐해지고, 토지에서 얻는 세금으로는 국가 재정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공납이 조세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공납으로 바쳐야 할 특산물이 수요와 공급을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에 보통 특산물을 가지고 있던 업자에게 특산물을 내게 하고, 대신 업자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이 성행하게 된다. 이를 방납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이 대가라는 것이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였기에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착취의 온상이 된다. 또한 방납업자는 보통 지방의 관아와도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었기에 소위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 대동법시행기념비, 비석에는 대동법을 시행하는데 큰 공을 세운 김육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조세체계가 문란해지고, 방납업자와 관료의 부정부패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피해로 전가될 수밖에 없어 백성들의 삶은 점점 어려워지게 된다. 또한 국가는 국가대로 수입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는 백성들을 더욱 가혹한 환경으로 내몰게 되고, 이 때문에 이러한 방납의 폐해를 해결하고, 국가의 세수를 건전화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대동법을 시행하게 된 이유였다.
대동법은 쉽게 기존의 공납을 특산물로 바치던 것을 특산물의 가치와 동일하게 쌀로 내도록 했는데, 토지 1결당 백미 12두를 내도록 했다. 쌀이야 어디서든 균질하게 생산이 되기 때문에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방납의 폐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국가의 입장에서는 세수의 증대가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 오게 된다. 물론 여기서 반발하는 세력이 있기 마련인데, 방납업자와 이를 비호하던 일부 관료들은 이것이 마치 하나의 기득권이자 이권이었기 때문에 실제 대동법이 시행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된다.
▲ 남양주시 삼패동에 자리하고 있는 김육의 묘, 오늘날에도 대동법이 추구했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 조세정의의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대동법시행기념비’
이처럼 대동법을 시행하는데 있어 명운을 걸었다할 정도로 집착했던 김육은 대동법의 전국적인 시행으로 확대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대동법이 후퇴해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니 그 노력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효종(재위 1649~1659) 역시 이러한 김육의 유언을 받아들여 최초 경기도에서 시작된 대동법은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김육의 아들인 김좌명(1616~1671)은 이러한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받았다.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도 개혁을 통해 백성들의 민생을 우선했던 김육, 후세에 그를 경세가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그의 행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처럼 대동법이라는 개혁을 추진했던 김육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공직자들이 한번 되새겨봐야 한다. 그것은 국가의 어떤 정책이나 결정에 앞서 그 중심에 민생이 가장 앞선다는 것이다. 여전히 시대의 가치로 유효한 조세정의를 비추는 거울로 ‘대동법시행기념비’는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재를 투영하는 우리 시대의 거울인 셈이다.
※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김희태는 수원시와 화성시, 전라남도, 경북관광공사 등의 블로그에 다수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평택 자치신문과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이 공동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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