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의 역사와 문화이야기] 평택의 청동기문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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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11-0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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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의 청동기문화, 중부 지역 청동기시대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 |
평택의 역사와 문화를 자세하게 알고 싶어 하는 시민, 독자 여러분들을 위해 지난 2014년 평택시의 분야별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평택시사>를 연재합니다. 평택시를 알고자 하는 모든 분들께 유익한 자료로 활용되는 <평택시사>가 발간될 수 있도록 힘써주신 상임위원, 집필위원, 편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말) ▲ 소사동유적 발굴 전경(고려문화재연구원) ■ 청동기시대 생활 유적 평택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최근 발굴조사로 많은 유적들이 확인됨에 따라 중부 지역 청동기시대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발굴 조사로 확인된 청동기시대 유적은 현화리유적·원정리유적·지제동유적·소사동유적·두릉리유적·남산리유적·양교리유적·토진리유적·소사벌유적·방축리유적·당현리유적·양교리 산41-1번지유적 등이 있다. 현화리유적은 남북방향의 구릉지대에 위치한 주거지 5기를 확인했는데 평면은 모두 장방형이고 수혈의 깊이는 지형을 고려해 조성됐다. 유물 중에는 공렬문토기와 구순각목문토기가 함께 나타나며 두형의 적색마연토기도 있다. 주거지에서 출토된 목탄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통해 기원전 10세기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이 연대 값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문화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지제동 유적에서는 주거지 8기와 움(수혈유구) 4기가 확인됐다. 주거지에서 화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완전한 형태의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런 점은 일정기간 동안 주거지에서 생활하다가 다음 주거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폐기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짐작된다. 지제동 유적은 한강 이남 지역과 중부 지방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무문토기 비교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특히 경기남부지역 선사 문화 이해의 중심적인 위치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8기의 주거지는 물줄기에 의해 대부분 유실됐고 형태를 알 수 있는 것은 A유적의 2호 주거지뿐이다. 이런 유구에 비해 유물은 무문토기 저부편 200여 점, 석기류 110여 점 등 많은 양이 출토됐다. 이는 오랜 기간 동안 청동기인들이 대단위로 거주했음을 증명해 준다. 출토된 공열토기·환상석부 등은 중부지역의 청동기문화 전파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동시에 경기남부지역에서 선사고고학의 조사가 미비했던 한계성을 극복시켜 주는 원동력이 됐으며 특히 평택지역의 선사시대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됐다. 원정리유적은 구연부 단면이 원형과 삼각형인 점토대토기의 구연부편과 축약된 외형의 저부편·타제 괭이머리·마제석부·석촉·석겸편 등이 출토됐다. 안화리에서는 진위천의 지류인 관리천을 따라 남동쪽으로 전개되는 논 가운데 농로에서 무문토기가 수습됐다. 무문토기편은 백봉리·기산리·무성산·자미산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들 유적은 인근지역보다 비교적 높은 구릉지대에 입지하는 공통점이 있다. ▲ 소사동유적 유적공원 전경(고려문화재연구원) 소사동유적은 청동기시대 주거지 81기가 발굴 조사돼 평택지역 청동기시대 연구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주거지 배치양상은 지점별로 약간 상이하게 나타나는데 가지점과 다지점은 구릉 정상부의 평탄면과 남사면 그리고 동사면부의 기반토인 풍화암반층을 굴토해 조성했다. 전체적인 배치양상은 ‘ㄴ’자 형태 가지점과 ‘ㅡ’자 형태 다지점을 보이고 있다. 관련 유물로는 이단병식석검·삼각만입 및 이단경식석촉·합인과 편평편인석부·반월형석도의 석기류가 있으며, 토기류는 기형상 심발형과 호형이 모두 확인된다. 구연부 문양은 이중구연·이중구연단사선·공렬·구순각목·구순각목공렬 등의 복합문이 주류를 이룬다. 소사동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 전반부터 후기 후반까지의 주거지가 확인되고 있으나, 절대연대 상 B.C 900~700년에 해당하는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의 주거지들은 확인되지 않았다. 청동기시대 전기 전반과 중반까지 약 400년간 취락이 지속되다가 전기 후반 200년간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공백기가 이어진다. 이후 후기 전반의 약 B.C 700년에 변화된 형태의 주거 양식으로 나타나 B.C 300년을 하한으로 하는 후기 후반까지 변화·정착·성행·쇠퇴하면서 지속된 것으로 파악 된다. 양교리유적은 청동기시대 주거지 44기가 확인됐는데 평면 형태는 세장방 형·장방형·방형·원형 등 다양한 형태로 확인된다. 주거지는 전기 중반부터 후기 전반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되며, 가락동식·역삼동식에서 송국리식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단계의 양상을 보인다. 이 과도기적 모습은 전기 후반(B.C 900~700)~후기 전 반(B.C 700~500)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주로 나타난다. 이로써 양교리 유적은 이 시기의 변화상과 정착·성행·쇠퇴까지의 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 다음에는 ‘평택의 청동기 문화 <하>’가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본 기사는 평택자치신문과 공동으로 보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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